뱌체슬라브 그리야즈노프 피아노 렉쳐콘스터
Vyacheslav Gryaznov
Piano Lecture Recital
카이스트에 21세기 나름 거물급 인사의 갑작스런 피아노 리사이틀(을 빙자한 렉쳐 강의) 행사가 있었다. 검색을 해보니 이번이 그의 첫 내한이었고 일주일 가량 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5월 22일 (카이스트에서 하루 뒤) 마포아트센터에서도 리사이틀이 있다고 했다. 그 사이 일정에 대전을 조용스레 방문해주셨다.
그렇게 유명하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취미로 피아노를 좋아하고 연주하는 아마추어들에게는 인기가 많을 것이다. 그를 가장 유명하게 해주는 작품이라 하면 당연 Italian Polka일 것이다.
https://youtu.be/YmSDDslA__M?si=8GHID2uYyZZY7rei
러시아 출신 음악가 스럽게 반음 스케일, 라흐마니노프와 비슷한 화성 진행을 능숙하게 접목한 것을 알 수 있다.
5월 21일 점심시간에 있었던 이 행사는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 이경면 교수님의 '서양음악사' 수업의 초청 연주의 일환이었으나, 공연 프로그램과 그의 연주 실력의 뛰어남을 고려해 대강당으로 장소를 옮기고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된 형태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리야즈노프가 아마추어 피아노 연주자들에게 인기가 많을 것이라는 이유에 대해 적어보고, 이 사람이 왜 중요한지, 이 행사에서 엿 볼 수 있었던 그의 피아노를 향한 열정을 이 글에 남겨보고자 한다.
1. 그리야즈노프는 왜 아마추어 피아노 연주자들에게 인기가 많을 것인가?
피아노는 다른 악기에 비해 소리를 내기가 쉽다. 건반을 누른다. 소리가 난다. 페달을 누르고 건반을 누른다. 소리가 오래 간다. 현악기의 경우 소리를 내도 듣기가 불편한 경우가 많고, 목관이나 금관은 소리가 아예 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마추어 악기 연주자의 상당수는 피아노에 포진하고, 대한민국에서 한 때 피아노 학원이 주류 학원이었음을 생각하면 그 시장 규모가 결코 적지 않음을 예상할 수 있다.
피아노를 그 과정에서 전공하는 학생들도 참 많았다. 학생 시절 음악을 전공하고자 하는 순간 음악은 괴물이 되어 다가온다. 고전 소나타, 푸가, 낭만 에튀드, 하농 등등은 입시, 대회, 연습을 위해 끝없이 반복하며 연습한다. 결국 전공을 해야하는 학생들은 평가를 위한 작품을 제외하고 다른 작품을 찾기가 어려운 환경이 놓인다. 전공생들은 완전한 음악가로 독립하기 이전에 자신의 레퍼토리를 스스로 찾아가기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추어 피아노 연주자는 자신이 연주하고자 하는 곡을 어떻게 찾을까? 대부분의 경우 알고리즘의 선택에 의해 곡을 알게 되거나, 다른 아마추어 연주자의 추천, 드라마와 영화와 애니메이션과 같은 매체, 피아노 리사이틀을 다니다가 접하게 된 곡 등으로 해당 곡의 존재를 알게 된다. 곡이 매우 매력적이면 난이도와 상관없이 그 곡을 연주하고자 한다. 나중에는 곡의 난이도, 길이, 분위기를 보고 곡을 선택한다.
그리야즈노프의 편곡은 쉽다고는 할 수 없지만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이나 이탈리안 폴카와 같이 비교적 대중적이고 선율적인 음악을 피아노에 이식하려는 노력으로 그 곡을 썼기에 인기가 많을 것이다.
2. 그리야즈노프의 도전은 왜 중요한가?
피아노는 다른 클래식 악기 (현악기, 목관악기)와는 엄연히 다르다. 혼자서 콘서트를 열어도 그 풍부하고 화려한 소리가 나며, 작품도 다양하다. 그리야즈노프는 교향곡, 실내악과 같은 피아노로 연주되는 악보가 없는 곡을 피아노 솔로를 위해 바꾸거나 기존의 피아노 곡을 더욱 화려하게 바꾼다. 이와 같은 노력을 하는 사람은 리스트부터 하여 계속 있어왔다. 그는 어떠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는가?
그의 연주를 들어보면 원래 오케스트레이션을 알고있는 곡의 경우 오케스트라가 상상되는 음악을 연주한다. 그러다가 종종 다시 이 연주가 피아노 1대의 연주임을 상기시켜주는 부분들이 나타난다. 피아노의 장점은 극대화 시키고 단점은 최대한 숨기는 편곡을 함으로써 피아노 연주 테크닉 그 자체에 대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다. 피아노를 통한 연주자의 테크닉 연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직 존재하고 이를 개척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중요하다.
3. 재밌는 사람
가벼운 공연이었던 만큼 가벼운 분위기에서 Q&A 시간이 있었다. 다양한 질문들이 오갔다. 필자는 피아노 악기의 한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했으나 대답은 피아노는 완벽하며 아직 작곡가들이 악기의 성능을 모두 끌어내지 못했다고 답해주었다 (피아노를 얼마나 사랑하는거야 당신 도대체). 곡과 곡 사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도 굉장히 가볍고 익살스러웠다. Pletnev의 호두까기 인형 편곡 버전을 처음 공연으로 연주한다는 말도 의아했다. 청바지에 스니커즈, 흰색 셔츠 한장을 입고 혜성처럼 등장해 아무렇지 않다는듯이 피아노를 치고 가는 그의 모습에서 진정으로 피아노를 즐기는 '음유시인'의 모습이 보였다.
아래의 모든 프로그램은 그리야즈노프가 피아노로 편곡한 작품들이다.
Borodin Nocturne from String Quartet No.2
- 보로딘의 경우 필자가 친숙하지 않은 작곡가 중 한 명이다. 이 작곡가의 현악 작품과 피아노 실내악 작품이 뛰어나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다. 오히려 이 연주자를 통해 들은 보로딘의 작품은 쇼팽과 라흐마니노프의 스타일이 적절히 섞여있는 하나의 독자적인 피아노 작품처럼 느껴졌다. 첫 곡을 들은 순간 역시 그리야즈노프는 러시아 음악의 색채를 진하게 이어가고 싶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 있었다.
Tchaikovsky Waltz of the Flowers from Nutcracker
- 해당 곡을 본인이 작업한 이유는 뒤에 나올 Pletnev가 호두까기 인형 작품을 피아노로 바꾸는 과정에서 생략되었지만 꽃의 왈츠를 너무 좋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명불허전. 만약에 취미로 피아노를 치고 싶은 사람에게 주저없이 추천해주고 싶은, 적당한 도전의 난이도를 지닌 작품이었다.
Tchaikovsky-Pletnev Suite from Nutcracker
- 이 곡을 무대에서 연주해보는게 처음이라 말했다. 또한 명불허전. 곡의 마지막에 위치한 pas de deux의 화려한 아르페지오 위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하향 진행 선율은 러시아 발레의 우아함을 가장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해당 곡을 국내에서 러시아 피아니스트를 통해 들었고, 소규모의 인원으로 진행된 행사인만큼 하우스 콘서트의 분위기가 났다. 이 모든것이 어울려 마치 내가 러시아 귀족이 된것만 같은 기분을 주었다.
Mahler Adagietto from Symphony 5 (for the left hand)
- 왼손만 이용한 곡은 종종 있어왔다. 전쟁으로 오른팔을 사용할 수 없게 된 동료 피아니스트를 위해 작곡했다는 이야기가 가장 감동적이긴 하지만 아마 그것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는 하나의 새로운 도전이었을 것이다. 현악기와 하프로만 이루어진 이 작품은 목금타(목관, 금관, 타악기 라는 뜻)이 포함되지 않아 오히려 하나의 손으로 극복 가능했음을 직접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현악기가 오랫동안 음을 끄는 부분을 과감하게 삭제한 것은 아쉬운 지점이었다. 현악기의 울림에서 오는 감동을 피아노는 전할 수 없을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Ravel La Valse
- 가장 좋아하는 왈츠 작품이다. 현악기의 우아한 글리산도를 피아노는 다소 과격하게 연주되는 경향이 있고, 피아노가 아무리 다성 음악을 혼자서 연주할 수 있다해도 라발스의 경우 그것보다 성부가 많은 부분이 종종 존재하기에 작곡가 본인 조차 피아노 작품에서는 오케스트라에 비해 생략되는 부분들이 종종있다. 몇몇 연주가 어려운 부분을 개선하고, 확실히 들려주고 싶은 성부를 다른 손에 배치시키는 노력, 생략된 목관의 날카로움을 잘 표현했다. 하지만 본래의 라벨의 작품을 많이 토대로 하여 약간의 변형만이 있었기에 본래의 작품보다 아쉬운 부분이 많은 작품이었다 (특히 글리산도를 스케일로 바꾼건 개인적으로 아쉬웠다).
그의 연주의 전반에는 확신이 있었다. 악보를 수정한 것을 비판하는 음악가도 있지만 곡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가 끝없이 실험하고 고민했을 과정을 상상한다면 마냥 비판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애초에 그리야즈노프는 작곡가들이 겪는 창조의 고뇌를 충분히 이해하며 편곡은 그 난이도가 훨씬 쉽다고 강의에서 이야기했다. 그의 가치관과 행보를 떠올리며 아마추어와 프로 모두를 아우르는 영향력이 인상적인 연주였다. 이런 좋은 기회를 누릴 수 있어 매우 감사했다. 이전의 다른 리사이틀과는 있는 그대로 피아노의 음악을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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